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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디어】 조문곤 기자 = 국산 세단 최초의 5리터 8기통 엔진 탑재, 최초의 액티브 크루즈 컨트롤 탑재, 최초의 4륜구동 세단, 국산 최초 10개 에어백 적용, 국산차 최초로 차 값 1억원 돌파... 쌍용차의 플래그십 세단 ‘체어맨’이 대한민국 자동차 역사에 남긴 족적들이다.

체어맨은 올 12월을 끝으로 단종된다. 1997년 처음 출시된 이후 20년만이다. 체어맨은 이름 그대로 ‘회장님 차’로 불리며 한 때 우리나라 고급 세단을 대표했던 차였다. 연간 판매량이 1만대를 넘는 등 에쿠스와 엎치락뒤치락하는 ‘달콤했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최근 월 40대 수준의 저조한 판매량에 허덕이다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출시부터 단종까지 체어맨의 20년 역사를 간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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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출시된 1세대 체어맨. 경쟁차를 압도하는 스펙에 '벤츠 프리미엄'이 더해져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출시 두 달 만에 1,000대 판매, 영광의 시작
1997년 10월 14일 쌍용차가 체어맨을 출시했다. 이름부터가 ‘회장님’이었다. 최고급 세단을 목표로 4년 간 4,500억원을 투자해 만들었다. 이렇다할 세단없이 SUV만 만들던 쌍용차가 회장님 같은 VIP 취향 저격용 차를 홀로 개발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래서 메르세데스-벤츠(이하 벤츠)와 기술제휴를 맺고 전반에 걸쳐 벤츠 DNA를 이식했다. 1984년식 E클래스(W124)의 플랫폼에 벤츠의 파워트레인을 얹고 벤츠의 수석 디자이너가 매만진 차체 디자인으로 완성했다. 이와 함께 벤츠로부터 안전사양을 대거 받아 체어맨에 넣었다. 덕분에 그 당시 경쟁 모델이라 할 수 있었던 현대 다이너스티나 기아 엔터프라이즈와는 격이 다른 안전성을 갖췄다. 

뚜껑을 열어보니 대성공이었다. 풀옵션 기준 5,800만원이 넘는 체어맨은 계약 하루 만에 1,000대가 넘게 계약됐고, 주문생산 방식으로 계약을 받았던 리무진도 130대 가까이 주문받았다. 체어맨은 등장하자마자 단숨에 시장에서 가장 각광받는 고급 세단이 됐다. 2리터~2.5리터급 엔진이 주력으로 팔리던 경쟁차들과 달리 체어맨은 벤츠의 3.2리터 6기통 엔진이 들어간 모델이 주력이었다. 진짜 회장님들의 선택을 받는데 성공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부드러운 주행질감과 경쟁차를 압도하는 안전사양, 그리고 ‘벤츠 프리미엄’을 등에 업고 대형 세단 시장을 장악해 나갔다. 

체어맨에 벤츠 DNA를 너무 많이 이식한 나머지 해프닝도 있었다. 출시 직후 열린 1997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서 체어맨은 벤츠 S클래스를 닮은 외관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SUV만 만들던 아시아의 작은 자동차 회사가 벤츠 냄새를 폴폴 풍기는 최고급 세단을 내놓자 관심이 폭발했던 것이다. 체어맨이 지나친 관심을 받자 벤츠는 급기야 체어맨을 전시장에서 빼달라는 요구를 해왔다. 쌍용차는 체어맨 개발에 전폭적인 협력을 해줬던 벤츠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다. 결국 체어맨은 전시된 지 하루 만에 전시장에서 강제 철수됐다. 전화위복이었을까. ‘체어맨 강제 철수’ 해프닝은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며 오히려 ‘체어맨=벤츠’라는 인식을 더욱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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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기형 체어맨에 대우의 3분할 그릴의 조합은 고객들의 그릴 교체 요구가 빗발칠 정도로 어울리지 않은 조합이었다 

1년간의 흑역사, 대우 체어맨
그러나 체어맨이 출시된 직후 IMF가 터졌다. 당시 막대한 부채를 안고 있던 쌍용차는 삼성차와의 인수합병을 밀어붙였고, 해외로는 벤츠와 인수합병을 타진했다. 그러나 쌍용차의 SUV 라인업에 관심이 많았던 대우차가 인수전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고, 결국 1998년 초 쌍용차는 대우차에 인수됐다. 

다행히 체어맨 브랜드는 유지됐지만 대우차 특유의 3분할 그릴이 체어맨에 붙었다. 당시 대우차의 중소형차에 붙는 그릴과 체어맨의 조합은 최악이었다. 실제로 쌍용차 시절의 원래 그릴로 바꿔달라는 고객들의 요청이 빗발쳤다. 어쨌든 엠블럼과 그릴만 대우차일 뿐, 체어맨 본연의 편안함과 위엄은 여전했다. 체어맨을 만들던 평택공장은 벤츠의 품질관리 시스템을 도입해 더욱 높은 품질로 차를 생산했다. IMF 이듬해 경기가 꽁꽁 얼어붙었지만 체어맨은 1998년 한 해 3,000대 가까이 팔리면서 존재감을 과시했다. 1999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방한했을 때 체어맨이 의전차로 선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쌍용차를 삼켰던 대우그룹 역시 IMF 이후 갖가지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었다. 결국 1999년 11월 대우그룹이 워크아웃에 들어갔다. 쌍용차는 다시 홀로서기에 나섰고, 체어맨은 다시금 쌍용차 품에서 제2의 도약을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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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출시되어 '체어맨' 브랜드의 최전성기를 누린 뉴 체어맨(위)과 B필러를 잘라 길이를 연장한 리무진 모델(아래)

페이스리프트, 치열한 경쟁 속 전성기
2003년 부분변경모델인 뉴 체어맨이 출시됐다. 뉴 체어맨은 당시 독일 플래그십 세단들을 철저하게 벤치마킹해 각종 안전사양과 편의사양을 몰아넣었고, 외관은 더욱 세련된 디자인으로 꾸몄다. 뉴 체어맨은 체어맨 20년 역사를 통틀어 최전성기를 열었다. 2008년 풀체인지 모델인 체어맨 W가 출시되기 이전까지 뉴 체어맨은 경쟁모델인 에쿠스와 판매량에서 각축을 벌였다. 매년 1만대를 넘게 팔아치우며 성공가도를 달리던 체어맨은 2005년 한 해에만 1만5,466대를 팔며 판매량의 정점을 찍었다. 

하지만 2004년부터 쌍용차를 둘러싼 상황이 크게 바뀌기 시작했다. 2004년에는 쌍용차가 상하이차에 매각되며 회사 안팎으로 어수선해졌다. 체어맨이 에쿠스와 경쟁하는 사이 재규어의 기술을 이식받은 기아차의 오피러스가 뛰어들면서 경쟁은 더 치열해졌다. 2005년 판매량이 정점을 찍었던 체어맨은 이후 점차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고, 2007년에는 연간 판매량 1만대 벽이 무너졌다.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쌍용차는 후속 모델인 체어맨 W 개발에 속도를 냈다. 또한 2006년에는 판매량이 크지 않던 2.3리터 엔진 모델(400S)은 단종시키고, 대신 3.6(700S)리터 엔진이 들어간 모델을 투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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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산차 최초'라는 수식어를 가득 달고 나온 2세대 모델 체어맨 W

풀체인지, 마지막 '대한민국 CEO'
2008년 2세대 모델로 풀체인지된 체어맨 W가 나왔다. 체어맨 본연의 가치는 유지하되 좀 더 세련된 이미지를 위해 ‘대한민국 CEO’라는 문구를 함께 들고 나왔다. 쌍용차가 절치부심해서 준비한 만큼 ‘최초’의 타이틀도 한 가득이었다. 체어맨 W는 국산승용차 최초로 5리터 V8 엔진이 들어갔고, 에어백도 국산차 최다인 10개를 넣었다. 또한 3.6리터 엔진 모델에는 국산승용차 최초로 ‘4트로닉’이라고 이름붙인 4륜구동이 들어갔다. 

체어맨 W는 출시 첫 달에만 1,000대를 넘게 파는 등 시장의 반응이 괜찮았다. 그러나 하필 비슷한 시기에 현대차가 제네시스(BH)를 내놓으면서 판매량을 상당부분 잠식당했다. 게다가 1년 뒤인 2009년 풀체인지된 2세대 에쿠스가 나오자 체어맨 W의 판매량은 더욱 급격한 내리막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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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출시된 체어맨 H. 2011년 세로형 그릴과 범퍼 형상이 바뀐 후기형 모델이 나오기도 했다(사진) 

보통은 풀체인지 모델이 나오면 전 세대 모델은 단종시키기 마련인데 쌍용차는 전 세대 모델에 ‘체어맨 H’라는 이름을 붙여 함께 팔았다. 라인업의 폭을 넓히는 차원도 있고, 가격을 낮춘 ‘보급형 체어맨’을 내세워 판매량을 늘려보겠다는 의도였다. 그러나 ‘보급형 에쿠스’인 제네시스와 경쟁하게 되면서 시장에 신선한 충격을 주지는 못했다. 제네시스가 높은 상품성과 최신사양으로 중무장하고 나온 반면, 체어맨 H는 쌍용차 특유의 한 세대 뒤진 듯한 실내 디자인과 가격경쟁력에서 뒤쳐졌다. 

판매량이 오피러스에게도 밀리자 2011년 체어맨 H는 소심한 반격 카드를 꺼내들었다. ‘체어맨 H 뉴 클래식’이라 이름 붙인 부분변경 모델이었다. 체어맨 H 뉴 클래식은 고급차가 보다 젊어지는 추세를 반영해 외관 디자인에서 중후함을 덜어내고, 실내 역시 체어맨 W와 유사하게 꾸몄다. 그러나 ‘뉴 클래식’이라는 이름처럼 ‘새로운 사골’일 뿐 우릴대로 우려낸 ‘사골’ 이미지는 극복하지 못했다. 결국 체어맨 H는 2014년 12월을 끝으로 단종됐다.

사실 체어맨 H는 고육지책이었다. 본래 쌍용차는 체어맨을 통해 얻은 노하우로 그랜저급 준대형 세단을 준비했었다. 세단 라인업 확장을 위해서였다. 시제차까지 제작했지만 결국 포기했다. 그랜저를 능가할만한 상품성을 가진 차를 만들려면 감당하기 힘든 개발비용이 들어가야 했다. 설사 막대한 돈을 투자해 만든다고 해도 이미 준대형 세단의 교과서로 시장에서 자리매김했던 그랜저를 넘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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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출시된 부분변경 모델 뉴 체어맨 W 

체어맨, 역사 속으로 사라지다
홀로 남은 체어맨 W는 고군분투했으나 에쿠스를 경쟁에서 이기지 못했다. 2013년부터는 연간 판매량이 2,000대 이하로 떨어졌고, 2016년에는 1,000대 이하(957대)로 주저앉았다. 특히 2015년에 현대차가 작정하고 만든 제네시스 EQ900의 출시는 치명타였다. 상품성, 가격경쟁력, 브랜드 가치 등 거의 모든 면에서 EQ900에 밀리면서 체어맨 W는 사실상 경쟁에서 낙마했다. 

판매량이 바닥을 모르고 추락하면서 체어맨 W를 포기해야한다는 목소리가 쌍용차 안팎으로 커졌다. 쌍용차의 의지와 관계없이 체어맨 W의 올해 판매량은 쌍용차가 체어맨의 역사를 끌낼 수밖에 없다는 신호였다. 올 상반기에 체어맨 W는 344대를 팔아 월 50대 수준의 판매량을 보였고, 하반기 월 판매량은 40대 수준으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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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출시된 뉴 체어맨 서밋(Summit). 체어맨 W 리무진을 베이스로 실내 공간을 고급화한 모델이다

쌍용차는 지난 20년 간 회사의 흥망성쇠를 함께한 체어맨을 쉽게 포기하지 못했다. 상징성도 컸고, 충성고객도 많았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다른 얘기를 하고 있었다. 체어맨은 '대한민국 CEO'를 내세웠지만 정작 판매량은 대한민국 CEO들이 외면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경쟁자인 제네시스 EQ900은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상대가 됐다. 체어맨 W의 후속 모델을 개발하려고 해도 그만한 비용을 감당할 여력도 되지 않았고, 만든다고 해도 EQ900을 능가하는 상품성과 가격경쟁력을 가진 차를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쌍용차는 자신들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SUV에 집중해 SUV 전문 브랜드로 거듭나는 게 낫다는 현실적인 판단을 한 것으로 풀이된다.

아듀! 체어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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